실험 설계와 과정 및 효소의 구조 변화. 연구그림 UNIST 제공1초당 백만 번이라는 빠른 속도로 작동하는 생체 효소 분자의 반응 과정이 '분자 영화 기술'로 포착됐다.
촬영 컷을 이어 만드는 영화처럼 효소 분자의 반응을 단계별로 얼려 촬영하고 이를 순서대로 복원한 기술이다.
UNIST(울산과학기술원) 물리학과 김채운 교수팀은 탄산탈수효소II가 이산화탄소를 탄산으로 바꾸는 반응을 원자 수준에서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고 12일 밝혔다.
탄산탈수효소II(Carbonic Anhydrase II)는 이산화탄소를 물에 잘 녹는 탄산이온으로 바꾸는 단백질 촉매다.
이 촉매 분자의 활성자리에 이산화탄소가 붙었다가 탄산으로 바뀌어 떨어지는 반응이 일어난다.
반응이 1초에 백만 번 이상 일어날 정도로 빨라 그 중간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던 것.
하지만 연구팀은 자체 설계한 분자 영화 기술로 반응 전 과정을 포착했다.
활성자리에서 물 분자가 자리를 바꾸고 새 물이 유입되면서 탄산이온이 빠르게 방출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진 왼쪽부터 김채운 교수, 김진균 박사(제1저자). UNIST 제공물 분자의 재배열과 교체라는 반응 중간 단계가 생성물 방출 속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였다.
분자 영화 기술은 온도를 낮춰 효소 반응을 인위적으로 멈춘 뒤, 고정된 구조를 X선으로 연속 촬영해 시간 순서대로 복원하는 기술이다.
연구팀은 영하 183℃에서 효소를 결정화한 뒤, 광분해성 기질(3NPA)을 넣었다.
이 기질은 자외선을 받아 효소의 활성자리에 순간적으로 이산화탄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온도를 영하 73℃까지 단계적으로 높이며 구조를 촬영했다. 이 X선 구조 데이터를 이어 붙여 효소 반응 전 과정을 '분자 슬로우모션 영화' 처럼 재구성했다.
제1 저자인 김진균 박사는 "영하 113℃에서 영하 93℃ 구간에서만 나타나는 반응 중간 상태를 원자 수준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효소 반응의 중간 단계를 구조적으로 포착한 것은 세계 최초"라고 설명했다.
김채운 교수는 "새롭게 밝혀진 원리는 단백질 공학과 신약 개발은 물론 물 분자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방식의 생체 모방 촉매 설계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지난 5월 12일 온라인 출판됐다.